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해 걸어간 거인

김동욱 작가
written by kroadedu · 2026. 10. 7

가을 한 가운데 서서 맞이하는 설악산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구름이 지나갈 법도 한데 거짓말처럼 한 점도 없다. 파란 하늘을 달리 묘사할 단어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맑고 파란색이다.

한 지인은 벽공(碧空)이라는 단어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파랑색으로 가득 찬 하늘과 텅 빈 파랑이라는 중의적 표현일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한자어 그대로 풀어낼 수도 있고, 반야심경의 진리를 아우를 수도 있을 듯하다. 멋진 표현을 일깨워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인제 백담사 내 노란 단풍과 파란 하늘
인제 백담사 내 노란 단풍과 파란 하늘

백담사 가는 길.

알록달록 빛깔을 뽐내던 단풍들도 조금씩 빛을 바꾸고 있어 제행무상을 실감케 한다.

늦가을 인제 백담사 일주문 ⓒ국립공원공단 공식 블로그
늦가을 인제 백담사 일주문 ⓒ국립공원공단 공식 블로그

5분 남짓 걸었을까. 시린 계곡물 소리가 순례자를 반겨준다. 계곡을 따라 오세암 방향으로 난 작은 산길을 걷다보니 100년 전 이맘때 이 길을 다녔을 거인이 떠올랐다.

백담사에서 오세암 가는 산길
백담사에서 오세암 가는 산길
백담사에서 오세암 가는 길 옆 백담계곡 표정
백담사에서 오세암 가는 길 옆 백담계곡 표정

그도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을까?’

만해 한용운(1879~1944).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만해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세상에 선보인다.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지만, 일제 강점기 저항과 희망을 노래하며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시집 『님의 침묵』은 2026년 출간 100주년을 맞았다.

만해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초판 표지와 첫 페이지. 인제 만해문학박물관 소장
만해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초판 표지와 첫 페이지. 인제 만해문학박물관 소장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인제 백담사 입구에 있는 님의 침묵 시비
인제 백담사 입구에 있는 님의 침묵 시비

만해는 10대 후반이던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불교는 물론 다양한 서양 근대 사상을 공부했으며 1905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됐다.

30대 초반에 ‘낡은 것을 일소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낸 대사상가 만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독립선언서 ‘공약 삼장’을 썼으며 독립 선언서도 직접 낭독했다.

3.1 독립선언서. 왼쪽 위에 민족대표 33인과 한용운 이름이 있다. 인제 만해문학박물관 소장
3.1 독립선언서. 왼쪽 위에 민족대표 33인과 한용운 이름이 있다. 인제 만해문학박물관 소장

시대정신을 꿰뚫어 본 깨우침의 노래로 우리 민족 앞에 우뚝 선 만해. 조국 독립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입적할 때까지 그의 삶은 독립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사와 맞닿아 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벌이고 1943년 조선인학병출정에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마경을 번역했다고 한다.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아파했다. 청년들에게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고 역설했다. 만지풍설(萬地風雪) 차고 거친 뜰에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려는 매화, 주위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불우하다 슬프다 말하지 말고 눈보라 속에서 꽃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 했다.

전보삼,「화엄의 관점으로 본 만해사상 연구」,동국대,2007,p.87

만해의 족적은 백담사 곳곳에 남아 있다. 만해의 흉상은 물론이고 그의 이름을 딴 만해당과 그를 기억하는 만해 기념관도 건립돼 있다.

인제 백담사 현판과 설악산 현판 그리고 극락보전
인제 백담사 현판과 설악산 현판 그리고 극락보전
인제 백담사 만해당 정면
인제 백담사 만해당 정면
인제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 흉상
인제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 흉상

백담사 만해 흉상 옆에는 시집 『님의 침묵』 가운데 한 편인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인제 백담사에 있는 만해 흉상과 나룻배와 행인 시비
인제 백담사 경내에 있는 '나룻배와 행인' 시비
인제 백담사 경내에 있는 ‘나룻배와 행인’ 시비

왜 이 시를 골랐을까?

불교 금강경에는 부처님의 설법, 가르침조차도 중생구제와 해탈의 도구로 여겨야 한다는 경구가 있다.

그러므로 응당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설법을 뗏목과 같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도 오히려 응당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是故不應取法,不應取非法。以是義故,如來常說 汝等比丘,知我說法,如筏喩者,法尚應捨,何況非法)

『금강경』 6.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뗏목을 이용해 강을 잘 건너 왔지만, 그 뗏목을 머리에 이고 길을 나설 수는 없는 일. 소중한 도구였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해서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이치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역시 해탈에 이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깨닫고 나면 거기에 집착하거나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한 은유다.

그럼에도 만해는 ‘해탈에 이르게 하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한’ 바로 그 뗏목을 따스한 시선으로 챙기고 있다.

비록 중생은 ‘흙발로 짓밟고 물을 건너면 돌아보지도 않지만’ 그들이 올바른 길로 들어서기를 바라며 ‘날마다 낡아가며 기다리는’ 묵묵한 태도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만해의 깊은 뜻을 순례자들이 느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백담사 경내를 둘러본 뒤 수심교 아래 냇가로 걸어 내려왔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탑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몇몇 순례자들은 돌을 고르고 골라 정성스레 탑을 쌓고 있다.

‘만불만탑’

인제 백담사 백담계곡에서 바라본 만불만탑
인제 백담사 백담계곡에서 바라본 만불만탑
인제 백담사 백담계곡의 만불만탑 근접 촬영
인제 백담사 백담계곡의 만불만탑 근접 촬영

가족의 건강과 행복, 합격과 취업, 재물, 소원 성취 같은 평범하고 혹은 세속적인 바람을 담고 있을 것이다. 비록 하찮을 수 있는 돌멩이로 쌓았지만 그 어떤 예술작품 못지않게 아름답고 멋이 있다.

중생의 염원을 간직한 채 햇빛과 바람, 눈비 속에도 사계절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온 돌탑들.

그 모습이 경이롭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가 휩싸고 도는’ 100년 전 거인처럼.

만해 한용운 시조 「사랑」 친필 원고. 인제 만해문학박물관 소장
만해 한용운 시조 「사랑」 친필 원고. 인제 만해문학박물관 소장

봄물보다 깊으니라
갈산(秋山)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한용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