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한강교로 시작, 여의도 탄생과 변화의 이음으로

60년 전 마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화동 시인 정두수의 시를, 작곡가 박춘석이 오선지에 그려내니 ‘마포종점’이다. 노래는 이젠 사라져 버린 아련한 풍경 몇을 향수처럼 읊고 있다. 전차는 더는 갈 수 없는 종점이고, 갈 곳 잃은 시인도 강 건너 영등포를 바라본다. 당인리 발전소 불은 꺼졌고, 여의도 비행장에서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불빛만 쓸쓸하다. 전차는 마포나루에서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대신 노량진으로 건너간 한강대교가 영등포까지 잇대었다. 그 전차마저 1968년 사라진다. 다리라곤 군사용이거나 긴급할 때 뜬 부교(浮橋)가 전부이던 강가다. 그러니 마포대로도 그리 넓지 않은 한미한 신작로에 불과했다.

1968년 2월 29일 ‘제4한강교’가 착공한다. 당시로선 파격인 왕복 6차로다. 착공식이 열린 곳이 전차 마포종점이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이 여기까지 와 만세 시위를 펼친 3.1운동 유적지다. 제3한강교 시공사가 시공을 맡는다. 그런 연유로 설계가 제3한강교(한남대교)와 대동소이하다. 서울시장은 그때까지 공정이 지지부진하던 제3한강교보다 더 빨리 준공시키겠노라 선언한다. 빠르게 완공해야 할 이유는 명확했다. 목전의 여의도 개발이 급선무였다.

결과적으로 경부고속도로 서울∼대전 구간 완공에 맞춰 1969년 준공된 제3한강교보다 몇 개월 늦어졌지만, 정신없는 속도전임에는 분명했다. 착공과 동시에 ‘서울대교’가 된다.
여의도 유일 교량으로
상전벽해가 일상이었다.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곤 했다. 강과 산, 집과 다리도 마찬가지다. 잘린 산허리로 고속도로가 지나고, 쟁기질하는 논 옆에서 아파트가 솟았다. 너른 모래사장 수려한 한강 곳곳이, 제방에 갇혀 아파트 차지로 변하는 중이다. 청계천 가득한 빈민은 어딘가로 이주당했다. 가히 번갯불에 콩 볶던 시대다. 1967년 12월 영동1지구 개발이 시작되고, 경부고속도로가 1968년 2월 착공한다. 광주 대단지 계획이 발표된 6월에 첫 시민아파트가 독립문의 금화산에서 터를 닦는다. 도시는 도로와 지하도, 육교 공사로 먼지가 뿌옇고, 한강 따라 제방이 바쁘게 쌓인다.
1966년 3월, 5개년 계획으로 미국 AID(국제개발처)가 우리와 공동으로 한강 유역 조사단을 구성한다. 내용은 용수, 교통시설, 수력발전, 홍수 문제였다. 그해 7월 16일 대통령이 “한강 유역 개발에 민간투자를 유치하고, 강폭을 고르게 재조정하여 호안 시설을 새로 만들어 폭 30m의 도로를 닦고, 여의도 부근 등 강폭이 넓은 지역은 백사장을 매축하여 주택지구를 조성, 한강이 수도 서울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저 짧은 말에 서울의 당시 미래상, 현재 서울이 오롯이 들어 있다. 잘잘못을 떠나 이 한마디로 서울의 모습이 완결지어져 버렸다. 군대식 상명하복에 로봇처럼 정확히 시행된 결과이기도 하다. 청계천 중심의 서울이, 한강 중심의 서울로 이행된 전환점이기도 했다. 하나는 명확하다. 긴 시간을 통해 순기능과 역기능을 측정하지 않았다. 면밀한 계획 없이 군사작전 하듯 파헤치고, 강제 이주시켰으며, 합당한 보상은 물론 도시미래상마저 제대로 예비하지 못한 한계를 남겼다.

충직한 시장의 후속 조치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강변1로(노들로)가 힌트였다. 1967년 9월 22일 「한강개발3개년계획」이 발표된다. 총사업비 462.64억 투입으로 폭 20m, 길이 74.35km 강변도로와 인구 30만의 여의도, 제4 한강교 건설이다. 1968년 밤섬이 폭파되고, 비행장에 낮은 산 하나뿐이던 여의도를 둘러 제방이 쌓인다. 둥근 바퀴 같다고 ‘윤중제(輪中堤)’라 불렀다. 서울대교가 여의도 유일한 통로였다. 왕복 6차선은 훗날의 교통량을 내다봤다 할 수 있다. 혜안이다. 영등포 쪽 샛강은 ‘서울교’가 건넌다.
서울대교가 가 닿은 여의도는 ‘5.16 광장’이라는 너른 공지다. 여의도는 이 광장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명확하게 토지이용이 갈렸다. 북쪽은 대체로 정치와 언론, 남쪽은 금융과 상업, 주거지였다.
뚜렷한 목적의 다리
서울시장의 선언처럼 공사는 속전속결이다. 착공 3개월만인 1968년 5월 31일에 찍힌 한 장의 사진이 무척 친절하다. ‘서울대교 가설목적 및 효과’라 적힌 간판이다. 5가지로 정리했다.

- 기본 교통량을 초과한 제1한강교(한강대교)의 폭주 교통량을 분산 흡수한다.
- 경인 및 서울 안양 간을 최단 거리로 연결한다.
- 영등포 방면과 마포 만리동 경유 서울역 후 측 방면으로 직결한다.
- 여의도종합개발의 기간(基幹)이 되며 여의도 신흥도시 형성에 이바지한다.
- 본 교량을 유료화하여 투입된 공사비를 16년 안에 상환한다.
이를 통해 모두를 알 수 있다. 한강대교 교통량이 늘어났나 보다. 일찍이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 갈 때마다, 한강대교 자리에 배다리를 띄웠다. 강을 건너 장승배기와 상도동 국사봉을 넘어갔다. 하지만 영등포로 한강을 건너면, 안양천 따라 길이 비교적 평탄하다. 아울러 인천으로 연계도 수월하다. 이게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가설한 하나의 이유다. 서울대교가 여의도 개발의 가장 확실한 인프라임은 불문가지다. 이를 유료화하여 1970년 5월 준공기준 공사비( 19.98억(내자 11.14억, 외자 4.84억))를 회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유료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마포는 나루이자 막다른 길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서울의 시골’이라 불렀다. 다리 가설로 마포 땅값이 평균 3배 가까이 급등한다. 68년 3월 대로변이 평당 7만~10만 원, 뒷골목이 3만~4만 원이었다. 서울대교가 개통되자 대로변이 30만 원, 뒷골목이 5만~10만 원을 호가했다. 공항과 너른 백사장, 낮은 야산이던 여의도가 80년대를 지나며 정치와 금융, 언론과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해간다. 속도도 빨랐지만, 여의도 도시 역량이 막강해졌다. 이는 오래된 구도심 영등포보다 새로이 떠오르는 마포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상전벽해의 마포대로 주변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여의도 다리의 맏형
한강의 ‘맨해튼’으로 변모한 여의도는 명실상부 서울을 상징하는 하나의 중심지가 되었다. 섬이라는 제약과 한계로, 평면확장보다 수직으로 상승하며 고도화했다. 토지이용의 이런 경향성이 중심성을 더욱 키워내는 요소로 작동했다. 무릇 나라를 움직이는 제(諸) 기능이 이 섬에 망라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4년 11월, 가로 명을 재정비하며 서울대교란 이름을 버린다. 대신 전통의 마포나루를 드러내듯 ‘마포대교’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름이 바뀐 얼마 후, 한강의 강변도로가 급격한 변화에 맞닥뜨린다. 1986년 고속화도로로 위계가 높아진다. 이전의 강변도로와는 차원이 달랐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다. 이와 한강 다리를 잇는 모든 교차로가 불어난 차들로 터져나갈 지경이다. 1987년 교통량 조사에서 마포대교 하루 교통량이 138,691대다. 한강 교량 중 최고 수준이다.
그런 영향이었는지 개통 20년 후인 1990년을 전후하여 급속히 한계를 드러낸다. 1996년 보수·보강 및 확장에 들어간다. 최초 시공사가 확장 공사를 맡아, 하류 쪽으로 5차선 교량을 신설한다. 3년 반만인 2000년 7월 새 교량(길이 1,390m, 폭 22.8m)이 완성된다. 뒤이어 기존 교량의 상판을 걷어내고 주요 시설물 보강을 시행한다. 이로써 2005년 10월, 5차선 쌍둥이 다리가 되었다.
1981년 10월 여의도 동쪽으로 원효대교가 들어선다. 마포대교 영향이었을까? 유료로 운영을 시작하나, 워낙 한미한 교통수요로 투자한 건설사가 1년 2개월 만에 서울시에 기부채납 해버린다. 서쪽으론 1980년 공사를 시작해 1983년 공사가 중지된 서강대교가, 10년만인 1993년 공사를 재개해 1996년에 완공된다. 이로써 여의도를 잇는 3개 교량의 맏형을 마포대교가 맡는다.
널따란 백사장이 사라진 자리로 짙푸른 한강 물이 흐른다. 늘 붐비던 마포나루도, 밤섬도, 도성으로 드나들던 경강상인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 자리에 사람이 만든 섬과 섬을 잇는 다리가 우람하다. 둘은 필연이었을까. 마포대교가 한강의 맨해튼이라는 여의도를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