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과 경부고속도로 탄생의 산증인, 제3한강교
시작은 엉뚱했다. 군사 목적이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뇌리를 짓누르는 실체가, 제3한강교에 오롯이 드러난 셈이다. 휴전하고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한강 다리는 제2한강교(1965.01/양화대교) 하나 더해졌을 뿐이다. 그랬으니 전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최고 권력자 심기가 오죽이나 불편했을까. 말 그대로 ‘피난용 다리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이 제3한강교를 착공시킨 원동력이었다.
물론 ‘이게 전부’라고 말하기엔 서울 인구가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이었다. 착공(1966.01.19) 당시 인구가 360만 명(1966년 말 379만)으로 추산된다. 그해 이호철이 모 신문에 ‘서울은 만원이다’는 소설을 연재하던 때다. 한국전쟁(1950) 때 146만이던 인구가, 17년 만에 200만 명 넘게 증가해 있었다.
폭발적 인구증가는 도시공간구조를 재편해야 할 시급성과 필요성, 계획성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중·장기계획이 없다는 게 문제이자 한계였다. 이후 전개되는 엄청난 공간구조 변화가 무척이나 ‘즉흥적’이라는 인상을 그래서 감추기 어렵다.
애당초 연장 915m에 폭 19m(4차선)로 설계, 착공되었다. 강바닥을 파 우물통기초를 다져가던 3개월 후 갑자기 26m(6차선)로 확장하라는 건설부 지시가 내려진다. 문제는 역시 북한이다. 평양 대동강을 건너는 폭 25m 다리가 완공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1m는 더 넓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전국 차량 등록 대수 3만 대 미만인 시절에 벌어진 웃지 못할 ‘혜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나중 경부고속도로 서울 기점의 연결 교량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4차선으로 완성한 기초가 문제였다. 우물통에 박스(box)형 확대기초를 덧붙여 문제를 해결한다. 당시 한강이 백사장 일색이어서 가능한 공법이었다.
다리가 들어선 북쪽은 남산 기슭으로 옛 한강진(漢江津)이고 남쪽은 사평진(沙坪津)이다. 사평진 옆이 새말(新村)이고, 오늘날 신사동은 이 두 곳에서 한 글자씩 가져다 붙인 이름이다. 한강진은 말 그대로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나루로, 수시로 배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던 곳이다. 강 이름 ‘한강’도 이곳 한강진에서 유래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모름지기 장충단과 국립극장을 지나 남산과 매봉산 사이로 빠져 한강진에서 배다리로 강을 건넜을 것이다. 남산1호 터널이 아니라면 지금도 한강에서 서울 도심을 잇는 최단 거리다.
강남과 경부고속도로 개발의 촉매제로
제6대 대통령 선거일이 1967년 5월 3일이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과 젊은이들 생명이 담보였던 ‘월남파병’으로 박정희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금권·관권은 물론 야당 후보에 대한 갖은 방해 공작에도 곳곳에서 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선거가 치러지기 며칠 전인 4월 29일, 장충단 공원 유세장에서 박정희는 공사 중인 경인고속도로에 더해 “강릉·부산·목포를 잇는 기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공약을 그야말로 불쑥 내던진다.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경부고속도로 착공(1968.2.1.)이 이뤄졌으니, 가히 번갯불에 콩 튀기는 속도다. 그랬으니 애당초 ‘피난용’으로 그것도 6차선으로 착공해 둔 제3한강교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까. 그때까지 제3한강교의 공사예산 배정은 무척 인색했다. 관심이나 중요도를 크게 두지 않아서다.
더구나 경부고속도로 보상비를 아끼려고(?) 마치 전쟁 치르듯 속개한 ‘영동1지구 개발’이 지금 강남의 효시다. 그랬으니 제3한강교는 음양으로 서울 도시공간구조를 송두리째 바꿔내는 시작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구간의 기점과 노선이 결정되자, 영동 1지구 개발에 속도가 붙는다. 경부고속도로엔 그야말로 국가적 역량이 총집중된다. 1969년 대전까지 완공된다. 구간별·시기별로 오산∼천안이 9월 29일, 천안∼대전이 12월 10일, 제3한강교∼오산이 12월 20일에 완공된다. 제3한강교도 경부고속도로 대전까지 완공에 맞춰 돌관작업을 벌여, 12월 26일에 완공한다.
제3한강교 남단이 경부고속도로 기점이 된 건 순전히 무계획의 계획, 하느님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3한강교 완공과 같은 날 국립극장∼한남동까지 1.8km(폭 35m) 도로가 완공되어 시내와 연결된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부산까지 연결되고, 8월 15일 남산1호 터널이 준공된다. 이로써 제3한강교는 명실상부 한강진에서 강남 사평진을 잇는 최단 거리 교량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한남대교 시공을 맡았던 건설사가 강북과 강남에 각각 현장사무소를 두었다. 강남에 두었던 10kW짜리 발전기가 강남의 최초 발전시설이며, 교각에 이어 매단 전신선이 강남 최초 전화기였다는 우스개가 회자할 정도였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1979년 1월, 젊고 어여쁜 여가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열창한다. 강물이 제3한강교 밑을 흐른다고,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새처럼 바람처럼 흘러간다고. 대중가요에 한강 다리가 등장한 시작일까. 이 노래로 제3한강교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제2한강교는 몰라도 제3한강교는 어린아이까지 알게 되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 덕분에, 여가수도 유명 연예인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어느 다리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 떠오른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을까. 불과 13년 만인 1982년 11만 대/일, 1988년 15만 대/일이라는 경이적인 교통량을 처리한다. 1984년 ‘한남대교’란 이름을 얻는다. 그 사이 소위 영동이던 강남이 서울의 한 중심임을 자처하게 된 현상을, 엄청난 교통량이 대변하고 있다.
1969년 완공된 제3한강교가 강남 개발의 시발이다. 강남 개발에 잇닿아, 1980년대 중반까지 한강 다리가 우후죽순 생겨난다. 대체로 광역으로 확산한 도시, 급증한 인구와 교통수요, 도시 간 도로망 확산에 기인한다. 산업이 성장기로 진입하면서 교통체계의 변화, 자가용의 급증, 이동량(trip)의 증가가 동반된 결과다. 이처럼 철도 등 대중교통에서 자동차가 주인공인 도로 교통체계로의 변화도, 강남 개발 및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 시작은 엉뚱했을망정, 이런 체계로 이행을 매개한 건 한강을 건넌 다리들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가 붕괴한다. 비극이자 ‘한강의 기적’이라 자찬했던 엉성한 신화의 붕괴였다. 한강 다리 안전이 재조명된다. 그 바람에 한남대교도 안전 문제로 늘 도마 위에 오르내린다. 시민들이 불안해한다. 한 방송사 카메라가 물속으로 들어간다. 물살에 깨져나간 한남대교 교각 곳곳이 낱낱이 드러난다. 성수대교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까 공포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한남대교로 몰리는 교통량은 가히 기하급수적이다.
12차선 쌍둥이 다리로
안전에 대한 경각심에 더하여 한남대교 남·북단의 교통 지체가 극에 달한다. 남단의 올림픽대로와 경부고속도로, 강남대로를 잇는 곳마다 정체가 일상이다. 북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변북로와 연결 시급성은 물론 한남대로와 남산1호 터널이 용량 한계를 보인다. 각 결절점에서 흩어지고 모이는 교통량 처리에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한남대교가 교통체증의 대명사로 떠오른다. 1996년 12월 확장 공사가 시작된다.
옛 다리 하류 쪽으로 6차선 교량이 신설된다. 연장 919m(높이 19m), 폭 25.5m의 강상자형(steel box) 교량이다. 신설 교량이 2001년 3월 8일 개통되고, 강변북로 및 올림픽대로와 접속교로 연결된다. 옛 교량의 통행이 중단된다. 노후화한 상판을 걷어내고 주형 보를 보강해 상판 슬래브를 재시공한다. 교각과 우물통기초의 보수·보강도 이뤄진다.
2004년 8월 9일 길이 919m(높이 19m), 폭 25.7m의 6차선이 완공된다. 이로써 한남대교가 12차선 쌍둥이 다리로 재탄생한다. 2025년 기준 한남대교 교통량은 19.22만 대/일로 여전히 가장 붐비는 한강 다리로 기록되고 있다.
강물은 흐른다. 다리는 강물 위에 시간을 얹어 도시로 혈(血)을 공급한다. 즉흥으로 놓이기 시작했으되, 한남대교 위로 사람들은 매일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갔다. 그렇게 길이 되었다. 한남대교는 지금도 강남·북을 오가며, 말없이 도시의 시간을 바삐 건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