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체제의 종말과 건설산업의 글로벌 스탠다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대변하던 WTO체제는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1995년에 출범한 WTO체제가 약 30년만에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WTO체제는 무역을 비롯한 글로벌 정치경제질서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국내 건설산업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 건설시장은 WTO체제의 출범과 더불어 외국기업들에게 개방되었다. 비록 국내 건설시장에 진출한 외국기업 사례를 찾아보긴 어려지만, 건설정책이나 제도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WTO체제 출범과 더불어 국내 건설정책과 제도의 가장 큰 변화 흐름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추구했던 것이라고 본다. 국내 건설시장 개방 이전에는 건설업 면허부터가 오랫동안 허가제를 유지하면서 일반건설업체 수는 500개를 넘지 않았다. 그러다 건설업 면허가 개방되면서 일반건설업체 수는 금방 1만개를 넘어섰다. 공공공사 입찰제도는 건설업체들간 담합관행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사실상 제도로서의 역할이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루과이 라운드(UR)에 뒤이은 정부조달시장(GPA) 개방으로 입찰제도는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다. 1995년에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약칭 국가계약법)”이 제정되었고, 기존의 최저가 낙찰제도를 대신하여 적격심사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처럼 건설업 면허제도부터 입찰제도 등 건설정책과 제도 전반은 국내 건설시장 개방을 전제로, WTO체제의 논리에 맞추어 글로벌 스탠다드로 전환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1995년의 WTO체제 출범에 더하여 1997년말에는 IMF 외환위기까지 겪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 건설산업의 글로벌 스탠다드 추구경향은 더 가속화되었다. IMF부터가 구제금융 제공을 빌미로 한국에 더 많은 개방과 “영미식 시스템(Anglo-American System)”의 이식을 요구했다. 국내에서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모든 산업영역에 영미식 시스템을 핵심으로 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크게 확산되었다.
건설산업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건설시장이 개방되면서 국내건 해외건 간에 건설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중요해졌다. 어떻게 해야 국내 건설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글로벌 스탠다드 도입”이었다. 축구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 축구의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은 히딩크 같은 세계적인 감독을 영입하면서 동네축구를 탈피하여 유럽의 선진축구를 지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국내 건설산업도 세계건설시장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되던 미국과 영국식 시스템을 도입하고, 국내 건설시장 환경을 해외건설시장과 유사한 환경으로 전환해야 국내 건설업체들이 해외시장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때마침 영국에서는 1994년에 레이삼 보고서(Latham Report)를 필두로 건설산업 혁신을 위한 각종 보고서와 활동들이 추진되었고, 그와 관련된 저작물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1995년 WTO체제 출범을 전후로 “글로벌 스탠다드 도입을 통한 한국 건설산업의 선진화”는 건설산업의 핵심적인 화두로 부상했다.
지난 30여년간 국내 건설산업이 추구해 왔던 글로벌 스탠다드는 사실상 영미식 시스템(Anglo-American System)이었다. 영미식 시스템은 규제완화와 시장경쟁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단, 여기서 말하는 규제완화는 가격규제나 공급규제와 같은 이른바 ‘경제적 규제의 완화’였고, 환경이나 안전과 같은 ‘사회적 규제’는 갈수록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공급자 수가 많을수록, 시장에서의 경쟁이 더 치열할수록, 소비자가 누리는 경제적, 사회적 후생은 더 커지기 때문에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을 제약하는 모든 규제장치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설산업의 글로벌 스탠다드도 규제완화와 시장경쟁 제고가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영미식 시스템에서는 전문엔지니어들을 중심으로 건설사업관리와 감리가 이루어졌다. 국내에서도 이를 본받아 건설사업관리(CM: Construction Management)가 건설산업기본법 체계에 “제도”로서 도입되었고, 지난 30여년간 국내 건설산업을 구성하는 하나의 하위산업부문으로 성장했다. 1996년에 국내 최초로 설립된 CM회사인 한미글로벌은 2022년에 미국의 ENR(Engineering News Record)에서 선정한 글로벌 8위 PM/CM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험과 역량에 기반한 전문엔지니어 자격제도(PE 등)와 전문가 책임(Professional Liability)이 강한 것도 영미식 시스템의 특징이다.
계약과 문서 중심주의도 영미식 시스템의 중요한 특징이다. 독일, 프랑스,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대륙법계 국가와 달리, 영국과 미국은 성문법(成文法)이 없는 이른바 불문법(不文法) 국가다. 법령이 없으니 당사자간의 계약과 계약서가 중요하다. 법령을 대신할 계약과 관련해서는 FIDIC 계약조건이나 영국의 RIBA, 미국의 AIA 등 권위있는 기관에서 제시한 표준계약양식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투명하고 다단계적인 분쟁해결 메카니즘도 영미식 시스템의 특징이다. 건설공사 수행과정에서 발주자와의 법적 분쟁이나 클레임은 제도화되어 있다. 발주자를 상대로 한 소송이나 클레임을 지극히 꺼리는 국내 관행과는 크게 다르다.
이상과 같은 영미식 시스템에 기반한 건설산업의 글로벌 스탠다드도 WTO체제의 종말을 맞아 흔들리고 있다. 영국의 EU탈퇴(이른바 Brexit)와 트럼프 정부의 미국우선주의는 WTO체제의 종말을 초래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본다. 건설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때 세계 최고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았던 영국과 미국의 건설산업은 10~20년 전부터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지금 영국과 미국 건설산업이 당면한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영미식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주장하기가 민망해진다.
“영국은 더 이상 아무 것도 건설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고 영국인들 스스로가 탄식하고 있다. 최근 사례만 봐도, 템스강 해저터널(Lower Thames Crossing) 사업은 계획수립과 행정절차에만 2억 6,700만 파운드(약 4,600억원)를 쓰고, 35만 페이지의 서류를 양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1947년에 제정된 해묵은 계획법(Town and Country Planning Act)에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 법에 따라 영국의 모든 개발사업은 건별로 지방정부의 재량에 따른 승인이 필요하다 보니 기간의 장기화와 예측 곤란을 초래했다. 지방정부가 승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과도하게 수렴하다 보니 NIMBY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고, 소송이라도 제기될라치면 몇 년씩 절차가 마비되기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지경이다 보니 영국 건설산업에서 돈버는 집단은 변호사 밖에 없다고 한다. 특히나 까다로운 환경규제와 과잉엔지니어링도 문제였다. 런던과 북구를 잇는 고속철도사업(HS2)의 경우, 박쥐보호를 위한 터널 구간 비용만 4,000만파운드(약 700억원)를 지출했고, 주민반발을 피하고자 교량을 터널로 변경하다 보니 공사비가 급증했고, 그러다 보니 치솟는 공사비를 감당못해 북부구간을 대폭 취소한 사례도 있다. 고질적인 전문기술인력 및 숙련기능공 부족과 Brexit로 인해 저렴한 동유럽 노동자들이 대거 영국을 떠나다 보니 인건비 상승과 인력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미국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지 않다. 지난 20~30년간 건설이나 제조를 게을리 하다보니 전력망, 용수, 도로 등 인프라 수준이 대단히 열악하다. 반도체나 자동차배터리 공장과 같은 첨단시설은 건설할 인력, 자재, 역량이 없다 보니 한국의 제조업체들에게 투자만이 아니라 직접 미국에서 건설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도 연방정부-주정부-지방정부에 이르는 다층적인 규제와 악명높은 인허가 지연 문제가 심각하다. 작년에 조지아주 현대자동차 공장을 급습하여 한국인 기술자들을 구금했다가 추방한 해프닝에서 보듯이, 미국도 건설기술인력이나 숙련공 부족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미국의 건설산업은 소규모업체 중심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데다가, 주40시간 근무 준수에다가 엄격한 노동과 안전규제 등으로 인해 생산성도 낮다. 클레임을 비롯한 각종 법적 분쟁의 일상화도 건설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을 떨어드리고 공기 지연을 초래하는 원인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진출한 한국 제조업체들도 지금은 미국 건설업체가 아니라 한국 건설업체들을 활용한 공장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개방성과 투명성, 시장경쟁과 성과주의를 지향하던 영미식 시스템의 장점은 이제는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영국의 브렉시트나 미국 우선주의가 표방하는 바와 같이, 영국과 미국은 개방이 아니라 폐쇄와 고립을 선택하면서 글로벌 경쟁력의 상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국내에서조차 필수적인 건설수요에 대응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WTO체제의 종말과 함께 이제는 건설산업의 글로벌 스탠다드도 과거의 영미식 시스템이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새로운 글로벌 스탠다드의 의미와 내용은 아직 명확하지 않고, 향후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2가지 방향성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첫째, 모든 나라에 적용될 단일의 시스템이 아니라 블록벌 로컬스탠다드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미국식의 시스템이 아니라, 오늘날 파편화되고 있는 글로벌 정치경제체제와 마찬가지로, 미국 vs. 유럽 vs. 중국 vs. 인도 등 글로벌 사우스…..처럼 자국우선 내지 블록별 동맹이익을 우선하는 형태의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 글로벌 스탠다드가 될 것이다.
둘째, AI전환(AX)이나 디지털 전환(DX) 같은 기술기반의 표준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영국의 BIM ISO 표준은 글로벌 표준으로 정착 중이고, 자동화 로봇기술 및 OSC(Off Site Construction) 확산도 점차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고 있다.
WTO체제의 종말과 글로벌 스탠다드의 의미변화는 한국 건설산업에도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해 준다. WTO체제가 존속되는 기간동안 한국은 건설산업 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부문의 수출과 무역부문에서 많은 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나라다. 빠른 추격자 전략은 WTO체제에서도 유효했다. WTO체제가 종말을 맞이한 지금은 새로운 글로벌 스탠다드를 수립하고 적용하는 시장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지나간 WTO체제의 “영미식 시스템”을 대신할 새로운 “K-건설 시스템”을 제시하고 선도해야 할 시기가 왔다. 이를 위한 연구와 교육, 산학협동과 정책지원의 틀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한국 건설산업의 선진화가 아니라, 한국 건설산업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